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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미술관

소전미술관 특별기획전 <무용지용>
2022년 08월 31일(수) ~ 2022년 10월 23일(일)
소전미술관 1층 기획전시실
이정걸, 정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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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전미술관입니다. :)

소전미술관을 찾아주시는 많은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22년 특별기획전이 08월 31일(수)~10월 23일(일)까지 전시합니다.

이번전시는 경기도와 시흥시 후원으로 진행되는 특별전시로서 이정걸, 정찬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정걸 작가는 페트병이나 우리가 쓰다버린 한때는 유용했던 물건들을 박제하듯 작품으로 만들었다. 정찬부 작가는 빨대를 이용해 자연을 재해석했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즉 무용지용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플라스틱이나 재활용되지 못하는 현대의 무수한 쓰레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과연 쓸모없는 것은 언제까지 쓸모없이 남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지혜를 모아 다시 유용한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지. 이번 전시를 통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이정걸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공중에서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사랑하지 않는가.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와 파도소리에

꿈을 찾고 희망을 건져 올리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는가.

아름다운 바다가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와

스티로폼 부유물로 뒤덮여 우리를 향해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산을 사랑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논과 밭을 일구며

사랑을 심고 거두는 우리들 마음속 고향이 

눈물 흘리며 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제 나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헤쳐 수집한 오브제를 

캐스팅하고 소멸해 가는 존재의 흔적들을

떠내어 여러 방식으로 작업한다.

생성과 순환의 기적을 염원하며...

 

                                                  -작가노트 중에서-

                                                                                 

 

 

정찬부

'사용하고 나면 너저분하게 흩어져 

쓰레기통에버려지는 일회용 빨대지만 

존재감을 부여해주면 어떨까?.'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놀이와 같은

습작은 작은 씨앗이 숲을 이루듯 컬러풀한

플라스틱 빨대 조각들이 모여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 번 쓰고 쉽게 버려지는 재료에 닿은 시선과

새롭게 부여된 의미들을 끊임없이 재생되는

플라나리아처럼 늘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이렇듯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는 작품이 되기까지

나는 길을 가다 스치는 풍경, 찰나의 순간,

사소한 것들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한다.

영감의 삶의 어느 곳, 어느 순간에도

 얻을 수 있다지만그리 쉽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상에서 오는 경험과 관심에 감성의

언어로 말을 걸 때,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치유하려는

위로의 행위가 있을 때만이 비로써 가능해진다.

 

                                                  -작가노트 중에서-

 

 

 

기간

2022.08.31(수)~2022.10.23(일)

주최/후원

(재) 소전재단 소전미술관/경기도/시흥

전시장소

소전미술관 1층 기획전시실

작가

정찬부, 이정걸

작품수

45점

관람료

1,000원

기획전시실 내부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無用之用’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 베어지고 옻은 쓸 만하다는 이유로 쪼개진다. 사람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들이 쓸모 있다는 것은 알지만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

 

장자는 혼란한 세상에서 쓸모만을 추구하는 공자를 비판하며 無用之用(무용지용)을 역설했다. 쓸모없음에도 쓸모가 있으며 이것이 大用(대용)이고 神人(신인)도 상서롭게 여기는 大道(대도)라고 말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 셈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비닐이나 플라스틱 등 새롭게 가공된 물질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게 되었고 인간은 이것들의 쓸모에 빠져 이 새로운 인공물의 쓸모없음을 외면하고 있다. 장자의 말대로라면 이 쓸모없는 것들은 결국 세상에 남아 산을 이루고 바다를 메워 지구를 지키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 인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잘난 인간은 어디로 가 있을까? 이에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들이다. 몇몇의 예술가들은 버려진 것들에 주목했다. ‘무심코 버려지는 이 플라스틱 빨대를 어쩌면 좋을까.’라든지 ‘빈 페트병은 여전히 멀쩡한데 버리긴 아깝다.’는 생각. 대개는 그저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예술가들은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아름다운 조형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서의 작품일 수도 있다. 쓰레기로 작품 몇 개 만들었다고 세상에 버려지는 무수한 플라스틱을 감당해 냈다고 할 순 없지만 작가는 무심한 사람들 마음에 돌을 던져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자 한다. 바로 그것이 예술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던진 메시지는 작지만 큰 울림으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쓸모를 찾을 거다. 쓸모없는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장자의 역설을 넘어 쓸모없음을 다시 쓸모 있게 바꾸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소전미술관 특별 초대전시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無用之用>에서는 이정걸, 정찬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정걸 작가는 페트병이나 우리가 쓰다버린 한때는 유용했던 물건들을 박제하듯 작품으로 만들었다. 정찬부 작가는 빨대를 이용해 자연을 재해석했다.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무용지용은 작은 돌이 되어 던져지고 돌이 만들어낸 파장이 멀리멀리 퍼지길 기대하며 전시를 기획했다.  

 

소전미술관 학예사 최준석

 

 

 

정찬부

<작품소개>

인간이 만든 인공의 산물들은 차고도 넘쳐 이제 판단의 기준은 자연산이냐. 아니냐가 되었다. 더 나아가 자연산이 아닌들 그것이 문제될 것도 없다. 생화가 아니더라도, 성형을 했더라도 관대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그것을 구분하지도 못한다. 조물주의 역할에 도전한 사람들이 오히려 위대한 지금, 정찬부 작가는 빨대라는 소재를 가지고 세상의 무엇이든 만들어 낼 기세다. 그가 만들어 낸 ‘산세베리아’나 ‘도마뱀’ 등은 사실주의와 팝아트의 경계 어딘가를 넘나들며 관객의 시각을 자극하고 있다. <혼자서 당당히>에서의 곰인형은 작가와 함께 사는 반려견의 애착인형이다. 작가가 키우기 시작한 유기견과 유기견의 애착인형이란 관계적 이야기는 요즘의 세태를 그대로 대변한다. 그 자체로 현대적이고 동시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피어오르다>의 돌맹이들 역시 다양한 컬러의 빨대로 구현되었지만 빨대의 한계적 의미를 벗어난 시각적 효과를 갖는다. 이들은 공중에 둥둥 떠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또는 바닥에 불규칙하게 널려 있으면서 자연과 우주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의 최근작 <강박적 패턴>은 캔버스에 빨대를 붙여 작업한 소위 빨대회화이다. 평면의 회화를 물상으로 밀어올린 초기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있었다면 그는 빨대로 만들어낸 그만의 강박적 작품세계를 다시 평면으로 눌러 앉혔다. 이렇듯 그의 무수한 작품 속 패턴들이 결국 강박이라는 단어로 매듭지어지는데 어쩌면 이것이 정찬부 작가가 선물하는 새로운 자연인 셈이다.

 

 

 

 

이정걸

<작품소개>

버려진 페트병, 세제용기, 해드셋이나 칫솔까지도 박제된 듯 화석처럼 굳어 있다. 이처럼 이정걸 작가의 작품에서는 가용한 모든 것들이 멈춰버렸다. 시간이 정지된 어떤 순간이 포착되었을 뿐 이것은 ‘생성’ 또는 ‘소멸’ 둘 중 한 순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쓰다버린 플라스틱이지만 지구에 잠시 머물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로 치면 인간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다. 어쩌면 화석으로 굳어져 버릴 21세기의 단면을 미리 볼 뿐이다. 이정걸 작가의 <shell> 시리즈에 그 특징이 확연하다. 작가는 마치 거푸집처럼 플라스틱 용기를 이용하고는 거둬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작품의 모습은 용기의 안쪽으로 마치 겉모습 같지만 결국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는 제목은 <껍데기>라고 명명했으니 재밌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하얀일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쓰다 버린 플라스틱 제품을 배열했을 뿐인데 박제된 일기를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를 작품화했지만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알고 있던 친숙한 제품이 작품화 됐기 때문일까. 이 익숙한 플라스틱의 나열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경고음’이라든지 ‘신음소리’ 같은 불안함에서 ‘묵인’이나 ‘체념’같은 단어도 떠오른다. 침묵하는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